한류의 시작은 배용준이다?
한류(한국류, Korean Wave, Korean Fever)는 세계에 부는 대한민국풍이다. 1999년 중반 무렵 중국 언론이 '한국의 유행이 몰려들다'는 의미로 처음 언급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한류는 문화에서 파생되었지만 정치·경제·사회·스포츠 등 모든 영역에 걸쳐 있다.
한류가 본격적으로 맹위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두. 당시 한류 붐을 주도한 것은 드라마였다. <겨울연가>와 <대장금>은 한류 확산의 일등 공신이었다. <겨울연가>는 배용준이라는 한류스타를 배출했고, <대장금>은 한식 붐을 일으켜 이영애를 한류스타 클래스에 올렸다. 특히 배용준은 '영양(배용준을 부르는 일본식 존칭)' 신드롬을 일으켜 한류 붐의 진원지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한류에 넘친 부인들의 의미인 '한류 아내'라는 신조어가 태어났다. 일본 주부들이 한류 스타를 만나거나 드라마 촬영지를 보기 위해 한국을 찾아가며 일본 가정이 망가지는 세태를 꼬인 말이다. <겨울연가>의 한류풍이 불기 시작한 당시 배용준은 일본에서 음료, 자동차, 통신, 과자, 전자제품 등 광고를 통해 4개월간 무려 60억원에 가까운 수익을 올렸다.
해외 7개 국한류 스타팬클럽 회장단
해외 7개 국한류 스타팬클럽 회장단이 방한해 한국관광공사가 개설한 공사 내 한류관에서 '영준 형제 사랑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류애에는 체면도 없다. 하토야마 유키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부인들은 한류에 완전히 떨어진 퍼스트 레이디로 잘 알려져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의 아내인 미유키 부인은 '한국의 광팬'으로 유명하다. 일본을 찾는 남한류 스타를 거의 모두 만났다. 미유키 부인은 2009년 10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와 올림픽 콩그레스에 참석하는 덴마크에서 출국할 예정이었으나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는 배용준을 만나기 위해 해외방문 일정을 지연 그 정도다.
많은 일본 여성들이 <겨울연가> 이후 한국 문화에 완전히 떨어졌다. 배용준 이전에 가수계 은숙, 김영자 등이 있었지만 배용준이 한류 붐을 만들어낸 원조 한류 스타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한류라는 시대의 키워드를 만들어낸 일등 공신을 꼽으면 자연스럽게 배용준을 떠올리게 된다.
한류의 원조는 연사마다? 음. 한류 현상은 <겨울연가> 때 처음 했던 것이 아니었다. 스포츠 한류도 한때 대단했다. '농구신'으로 불린 신동파와 '셔틀콕의 황제' 박주봉이 스포츠 한류의 주연인 경우가 있다.
신동파는 1969년 태국 방콕에서 열린 ABC 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팀이 우승하는데 결정적 수훈을 세웠다. 결승에서 만난 상대는 당시 아시아 농구 최강이라고 자부하는 필리핀이었다. 필리핀은 신동파가 무려 50점의 골 폭탄을 쏟는 바람에 패배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 경기에서 한국팀은 95대 86을 이겼다. 이때부터 필리핀 국민에게 신동파는 경외와 우상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1970년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는 '신동파 양복점', '신동파팡가게' 등 신동파의 이름을 붙인 가게가 늘어선다. 당시 필리핀 최고의 인기 배우는 자신의 집 하나를 '돈파룸'으로 명명해 신동파만 묵을 정도였다.
박주봉은 배드민턴 국제대회 최다 우승(72회) 기록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살아있는 전설이다. 1990년대 박주봉의 이름을 딴 햄버거 '주봉버거'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한류의 역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시대에 이미 중국과 일본에서 인기를 모은 한류가 존재했다. 특히 백제는 일본에 한류 열풍을 일으킨 원조다. 백제는 박사제도를 두고 유학과 관련된 오경박사 등 학문 대가를 많이 배출했다. 왕인 박사도 그 중 한 명이다. 왕자는 백제의 최고 한류스타였다.
도쿄 우에노 공원에는 왕인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일본국의 응신왕은 박사 왕인을 초빙했다. 왕인은 285년 2월, “텐코몬”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공자는 춘추시대에 나와, 망고불후의 인륜도덕을 밝혀 천하만세에 율림의 시조가 되어, 박사왕인은 공자가 죽고 나서 760년 남짓으로 한국에 태어나… 창고에 빛나는 왕인 박사의 위업 이렇게 유구유대에서 끝이 없다" 에 들 수 있다. 일본 열도와 오사카, 나라 지역에는 백제의 흔적이 아직 남아 있다.
조선통신사는 백제, 통일신라의 맥을 이어주는 한류 방어였다. 통신사는 선진문물을 일본에 전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일본 문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통신사는 중앙관리 3명을 포함해 300~500명의 인원으로 구성됐다. 쓰시마번에서 빌린 호위무사와 안내인, 노동자를 포함해 2000여명에 이르는 행렬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한양에서 출발한 통신회사 일행은 부산, 쓰시마섬, 시모노세키, 오사카를 거쳐 교토와 도쿄에 도착했다. 부산에서 배를 타고 오사카에 도착해 육로에 갔다. 통신사 행렬이 한양과 에도(도쿄의 옛 이름)를 왕복하는데 약 6개월부터 1년이 걸렸다.
통신회사가 다니는 각 회(번, 제호가 통치하는 영지)는 통신사를 국빈으로 취급했다. 통신사사절에는 정식 외교사절 외에 유학자와 내래라는 조선 최고의 문인과 연예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방문하는 곳마다 서화·시문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통신회사의 숙소에는 군중이 항상 구름군처럼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는 광경은 지금의 한류 팬들과 비슷했다. 1636년부터 막부의 요청에 따라 마상재라고 불리는 광대를 데리고 가서 장군 앞에서 곡예를 선보였다. 그 인기가 폭발적이었고, 곡마의 묘기와 통신사의 행렬의 모습을 자개로 새긴 도장 포켓이 널리 유행했다.
한류의 힘. 고대 한류는 현재와 미래의 한류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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