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자동차는 ‘포니’다?
현대 사회에서 자동차는 단순한 교통 수단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소비자를 유혹하는 자동차 회사의 신모델 경쟁이 뜨겁다. 현대, 기아, 르노삼성, 도요타, 혼다, BMW 등이 펼치는 경기는 '전차대전'이라 할 만하다.
국토해양부가 2012년 2월 6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11년 12월 말 현재 국내 자동차 등록 대수는 1843만 7373대. 자동차 1대당 인구수가 2.75명 정도가 된다. 매년 등록되는 자동차 대수는 약 40만~50만대 전후다. 수입차도 꾸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현대차의 대표주자인 소나타는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린 중형차로 입지가 확고하다. 쏘나타가 처음 발매되는 당시의 이름은 '쏘나타'였다. 그러나 잠시 지나 쏘나타로 바뀌었다. 일부에서 「(개나) 소나를 타는 차인가」라는 슬픔이 있었기 때문이다. 쏘나타를 둘러싸고 좋은 바람 소문도 있었다. 쏘나타의 영문명 'SONATA'의 'S'자를 잡으면 서울대에 합격할 수 있을까, 쏘나타Ⅲ의 'III'가 수능 성적 300점을 보장한다는 소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 때문에 대학 입시철이라면 소나타 엠블럼을 몰래 분리하는 것까지 진행됐다. 쏘나타의 금이 칠해진 골드(GOLD) 마크가 인기를 모으고, 일찌기 드라이버 사이에서는 이 마크를 찾아 붙이는 유행이 퍼지기도 했다.
한국에서 처음 달린 자동차는 '포드 A형 리무진'이다. 이른바 '어차'다. 고종황제(1852~1919) 즉위 40주년을 기념해 1903년 의전용으로 미국 공관을 통해 반입했다. 포드는 2인승으로 작고 소음이 심했다. 그런데 어차는 황제가 차를 타는 것이 경망이라 궁전의 구경으로 전락했다. 결국 러일전쟁의 와중에 사라져 버린다.
1955년 전쟁 폐허 속에서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최초의 자동차가 발매되었다. 바로 '시발'이다. '시루'는 자동차 생산의 시작이라는 의미다. 한글에서는 ‘시바ㄹ’라고 표기했다. 시발은 지프형 6인승으로 배기량 2195cc에 최고 시속 80km로 달렸다. 큰 엔진을 켜는 것은 했지만 그리 빠르지는 않았습니다.
시발은 서울에서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국제 차량 제작의 창업자인 최무성, 혜성, 순성 등 3형제에 의해 개발되어 1955년 8월부터 1963년 5월까지 생산했다. 시발은 수제 승용차였다. 미군으로부터 불하를 받은 지프엔진과 변속기에 드럼캔을 두드려 펼쳐 만든 차체를 조립하는 식이었다. 주요 부품을 미국 차량에서 가져왔지만 국산차의 원조로 보는 이유가 있다. 실린더 헤드 등 엔진 부품을 한국 기술자가 공작기계로 깎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국산화율이 약 50% 정도가 된다. 이런 제조방식 때문에 시발차 1대를 만드는 데 4개월이 걸렸다.
시발은 1955년 10월 열린 광복 10주년 기념산업박람회에서 최우수 상품과 대통령상을 차지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시발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처음에는 8만엔 정도였던 차량가격이 1년 뒤에는 택시회사가 관심을 가지면서 30만엔대로 올랐다. 전금을 받고 주문을 받은 선약금만으로도 1억엔을 넘었다. 한층 더 프리미엄을 붙여 팔자 부유층의 부녀들 사이에는 「시발계」까지 등장했다. 1957년에는 9인승 '시발 세단'도 발매됐다. 6기통 엔진을 태운 정원 9인승차로 가격은 1대당 270만원 정도였다. 이처럼 시발이 인기를 끌면 버스, 트럭, 트랙터 제작에도 손을 뻗었다. '시발 택시'는 전국을 가로지른다.
지금과 비교하면 중고차 조립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당시에는 획기적인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정부 보조금이 끊어져 일본산 승용차 수입이 허락되어 시발은 추락의 길을 걸었다. 결국 닛산의 블루버드가 '신국자동차'라는 이름으로 수입돼 중단됐다. 시발은 회사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략 3000여대 팔렸다.
우리가 만든 고유 모델이 등장하기까지는 10년의 세월이 걸렸다. 1976년 국산 모델 1호인 '포니 1'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전까지 신진자동차 등에서 생산한 블루버드, 코로나, 크라운, 코티나 등은 외국 모델을 국내에서 조립한 것이었다.
포니 개발 뒷면에는 정주영(1915~2001) 전 현대그룹 회장의 불 같은 의지가 있었다. 정주영 회장이 1974년 국산차를 만들어 수출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선진국에서는 코움소리를 쳤다. 2만여 개 부품이 들어가는 종합기계산업자동차를 후진국인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생산한다고 했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주영 회장은 본 것처럼 포니(1300cc급) 개발에 성공했다.
포니 개발로 한국은 세계에서 16번째,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로 고유 모델을 생산하는 나라가 되었다. 또 포니는 국산 1호 수출차에서도 이름을 올렸다. 판매 초년도에 1만726대(약 227만원)가 팔려 국내 시장의 43%가량을 일소하고 6월에는 에콰도르에 6대를 처녀 수출했다.
이처럼 불을 붙인 자동차산업은 지속적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해 1996년 사상 처음으로 수출 실적 100만대를 돌파했다. 포니를 성공시킨 현대차는 2004년 7월 누적 수출 대수 1000만대의 고지를 넘어섰다.
포니는 2009년 9월 디자인 전문가 대상 설문조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한국 디자인으로 선정됐다. 슬림하고 현대적인 스타일로 한국 상품 디자인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때 '포니차'와 '카폰'의 값이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1984년 5월 아날로그 방식의 차량용 휴대전화(일명 카폰)가 상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단말 가격은 1대당 약 300만원. 여기에 설비비, 채권 등을 합치면 카폰치는 총 410만원에 달했다. 당시 '포니2'의 가격이 이와 비슷한 400만원대. 어쨌든 포니는 잠시 국내 자동차의 대명사 브랜드로 위세를 휘두르며 한국 자동차의 대중화 시대를 이끌었다.
'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류의 시작은 배용준이다? (0) | 2022.08.20 |
---|---|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서울에 있었다? (0) | 2022.08.19 |
세계에서 가장 빠른 열차는 일본에 있다? (0) | 2022.08.18 |
조용필이 오빠부대를 만들었다? (0) | 2022.08.17 |
우리나라 첫 TV는 삼성이 만들었다? (2) | 2022.08.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