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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많은 교양인을 위한 상식의 반전 101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서울에 있었다?

by 블로그상위노출 블로그광고업체 2022. 8. 19.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은 서울에 있었다?

호텔은 호화롭고 호화로운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호텔 게스트는 'customer'가 아니라 'guest'다. 최고의 예의로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호텔(hotel)의 어원은 심신을 회복한다는 의미의 라틴어 호스피탈레(hospitale)에서 유래했다. 이 말이 호스피탈(hospital)·호스텔(hostel)·인(inn)·호텔(hotel)의 변천을 거쳤다. 한국의 경우 신라 때는 역(驛), 고려일 때는 객배(舍), 조선 때는 역(驛)・원(遠)・여각(여각)・객주(객주) )라고 불렀다.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을 계기로 현대식 기업형 호텔이 등장했다. 교통수단이 발달해 여행자가 늘어나 호텔도 급성장한 것이다. 1850년에 지어진 프랑스의 그랜드 호텔은 유럽 럭셔리 호텔의 효시로 선정된다.

호텔 등급을 표시하는 방법은 국가마다 다릅니다. 미국은 다이아몬드, 유럽, 한국은 그다지 평가를 표시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호텔은 별 5개(별 5개), 별 4개(별 4개), 별 3개(별 3개), 별 2개(별 2개), 별 1개(별 1개)로 나뉩니다. 하지만 호텔 업계에서는 파크 하얏트 등을 6등급의 최고급 호텔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국관광호텔업협회 자료에 따르면 특1등급 호텔 객실 수는 2만2623실(2010년 말)이다. 이 중 40%(9036개)가 서울에 집중하고 있다.

한국 최초의 호텔은 서울에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던 인천이 먼저다. 1883년 인천항이 개항하여 각국의 외교사절과 여행객이 모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거의 서울이었지만 철도가 놓이기 전이기 때문에 인천에서 하룻밤 묵었다.

이런 사정을 간파한 일본인 해자력 태석은 인천 중구 중앙동에 호텔을 개관했다. 이것이 한국 호텔의 효시라고 불리는 대불 호텔이다. 1887년에 착공해, 1888년(고종 25)에 완공했다. 벽돌로 지어진 3층짜리 양관 건물로 서양식 침실과 식당을 갖추고 있다. 침대가 있는 객실은 11실, 다다미(마루 방을 향한 일본식 마운틴)의 방은 240실 규모에 달했다. 객실별 숙박료는 상급 2원 50전, 중급 2원, 하급 1원 50전이었다. 당시 일본식 여관의 고급 객실 숙박료가 1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비싼 요금이다. 길 맞은편에 상점을 하고 있던 중국 이태도 건물 2층에 스튜어드 호텔을 개업했다. 대불호텔은 항상 사람들로 붐비지만 1899년 경기도가 개통하자 심각한 불황을 경험하면서 중국인들에게 팔렸다. 새로운 소유자는 건물을 개조하고, 중화원이라고 불리는 오두막으로 용도 변경했고, 중화루는 한때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번영했다. 그러나 1978년 근대화파로 건물이 부서져 대불호텔은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는다.

이후 처음이라는 기록을 가진 현대식 호텔이 속속 태어났다. 그 중 하나가 최초의 서양식 호텔로 알려진 송탁호텔이다. 주한 러시아 공사 칼 베벨의 가족을 따라 서울에 온 프랑스계 독일 여성 앙투아네트 송택(Sontag)이 1902년 정동 경운궁 맞은편에 있는 땅을 고종에서 내린 호텔이다. 2층은 황실의 귀빈을 모시는 객실로, 1층은 보조실·식당·회의실 등에서 사용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숙박해 조선 대신 부르며 회유, 협박한 장소이기도 했고, 러일전쟁 때는 나중에 영국 총리가 되는 윈스턴처칠이 묵었다.

현존하는 한국 최고의 호텔은 조선호텔(현재 웨스틴 조선호텔)이다. 조선호텔은 진정한 의미의 한국 최초의 근대식 호텔이다. 1914년 서울 소공동에 건립됐다. 조선호텔은 대규모 정식회의가 열린 최초의 호텔이기도 했다. 또한 최초의 엘리베이터와 댄스 파티 등 많은 국내 최초 기록을 쏟아 신문화 수입의 산파역을 맡았다. 지하 1층과 지상 4층의 벽돌 건물을 세우는 데 들어간 건축 비용은 당시 우리 돈으로 84만3000원에 달했다.

이후 철도 개통 등 교통이 편리해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상용 호텔인 반도 호텔이 열렸다. 반도 호텔은 1936년에 착공하고 1938년에 준공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호텔은 주로 일본인과 외국인을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을 뿐이다. 반도호텔은 광복 후 자유당 시대에는 국회도 변하지 않을 정도로 정치인들의 출입이 빈번한 장소였다.